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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강화도로 피난 간 고려 조정은 강화도 동부 해안에 외성을 쌓았으며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갯벌을 간척했다. 고종 43년(1256) 강화도 동쪽 해안의 제포(梯浦)와 와포(瓦浦)를 막아 좌둔전(左屯田)을 만들고, 이포(貍浦)와 초포(草浦)를 막아 우둔전(右屯田)을 만들었다. 조선시대에도 간척이 이어졌는데 선두포 간척이 대표적이다. 가릉포와 선두포에 둑을 쌓아 간척함으로써 육지와 연결되었다. 석모도는 임진왜란 피난민들이 부분적으로 간척하였으며, 1706년 조정의 명으로 대대적인 간척이 있었다. 송가도, 매음도, 어유정도, 석모도라는 4개의 섬이 간척으로 하나의 섬으로 연결되었다.
한국전쟁 난민과 영세민의 정착지와 생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간척하였다. 국제원조협회(CARE)와 미국의 원조양곡 지원을 받아 1963년 착공하였다. 1967년 정부의 자조근로사업으로 선정되었고 한국전쟁 피나민들로 구성된 한국정착사업개발흥업회가 공사를 담당하였다. 난민과 영세민 등 연인원 40여만 명이 투입되어 1968년 완공하였다.
태안반도는 해안선이 복잡하고 갯벌이 발달하여 간척에 유리한 곳이다. 1920년대 중반 이후 활발하게 간척이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 미요시 와사부로[三好和三郞]가 천수만(淺水灣) 북쪽 끝의 갯벌을 간척하였다. 면적은 약 520ha로서 일제강점기 서산·태안 지역 간척지 가운데 가장 넓은 규모이다. 광복 이후 천수만 간척이 진행되어 지금은 내륙이 되었다. 천수만 간척지 서산A지구 북단에 위치한다.
일제강점기 태안반도 일원에서 조선인이 주도한 간척 사업 가운데 가장 넓은 면적의 간척지이다. 1930년대 중반 이판권과 이성렬이 간척 사업을 주도했으며, 이 간척지를 포함하여 태안반도 일원의 소원면 신덕리‧영전리, 남면 신온리 등을 간척했다. 광복 이후 서쪽으로 간척지가 확장되었으며 확장된 간척지는 최근 골프장으로 개발되었다.
국내 민간기업(현대건설)이 주도한 최초의 대규모 농업 간척사업이다. 국토 확장, 식량 생산량 증대 등 농업 개발을 목적으로 계획하였다. 1979년에 허가를 받고 1980년 착공하여 1995년까지 천수만 일원에 10,132h 규모의 농지를 조성하였다. 방조제 공사 마지막 단계에서 폐유조선(廢油槽船)을 가라앉혀 바닷물의 흐름을 막고 방조제를 연결하였다. A지구와 B지구로 나뉘며 간척의 결과 만들어진 넓은 농경지와 호수는 겨울 철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익산 황등제는 조선시대 벽골제, 눌제와 함께 호남의 3대 저수지로 불렸으며 1800년대 후반까지 남아 있었다. 1909년 후지이간타로[藤井寬太郞]는 임익수리조합을 설립하고 막대한 공사비를 투자하여 저수지를 다시 크게 만들어 수리조합의 농업용수원을 확보하려 했다. 그 결과 황등저수지는 익산, 함열, 임피 지역의 용수원으로 활용되었으며 일제강점기 근대적 수리사업의 성과로서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그러나 농업용수원으로서 충분한 기능을 하지 못하다가 1937년 경천저수지가 완공되며 다시 논으로 개간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수리왕(水利王)’으로 불린 후지이간타로[藤井寬太郞]는 1920년~1934년 동안 현재 군산시 산북동, 개사동, 신관동, 옥서면, 옥구읍에 걸쳐 약 2,300ha를 간척하였다. 불이흥업(不二興業) 간척지의 주요 농업용 수원은 옥구저수지이다. 옥구저수지를 경계로 하는 남쪽과 북쪽의 간척지에 불이옥구 농장과 불이농촌을 설립하여 식민지 지주제를 경영하였다. 일제의 식민지 농업의 성과로서 불이흥업 간척지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으며 일본인 이주 농민과 조선인 농민들이 경작하였다.
1925년 일본 오사카 출신 기업가 아베후사지로가 설립한 동진농업주식회사가 간척하였다. 1927년 방조제를 완공하여 1,785ha의 농경지를 새로 만들었으며 1928년부터 부분적으로 경작을 시작했다. 동진농업주식회사는 간척지에 이주민을 모집하여 대규모 쌀 농장을 경영했다. 1928년 동진수리조합에서 완성한 섬진강 상류의 운암저수지의 물을 동진강 상류로 끌어들여 농업용수로 사용하였다.
부안군과 군산시를 33.9km의 방조제로 연결하여 40,900ha의 국토를 새롭게 만드는 우리나라 최대의 간척사업이다. 1971년 만성적인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옥서지구 농업개발계획’ 수립을 시작으로 하여, 1987년 12월 노태우 대통령 후보자의 선거 공약 발표를 계기로 새만금 간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1991년 11월 공사를 시작하여 2010년 4월 27일 방조제 연결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농업용지 개발을 목적으로 시작하였으나 2021년 이후 청정에너지와 신산업, 친환경 농업, 관광·생태, 국제 교역이 조화된 공간으로 개발하고 있다.
섬진강댐 건설로 발생하는 수몰 농민의 정착지를 마련하기 위해 1963년 3월 15일 착공하였다. 계화도 간척사업의 목적은 농경지 확보와 동진강 유역의 농업용수 공급 개선이었다. 이 사업의 결과 계화도 주변에 약 3,000ha의 새로운 농토를 확보했으며 동진강 유역의 수리·관개 시설을 개선하여 7,000ha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였다. 방조제는 1968년 완공하였으며 1978년 첫 수확이 이루어졌다.
1930년대 고창 해리 간척을 진행하고 있던 일본회사인 해원(海元)농사는 간척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31년 삼양사(三養社)로 상호 변경한 삼수사(三水社)는 1936년, 해원농사가 진행하고 있던 간척 공사권을 인수하여 고창군 해리면과 심원면 일원의 2,180ha를 간척하고 해리농장을 설립하였다. 1946년에는 해리 농장의 일부 농지를 염전 개발 허가를 받아 1947년 염전 축조 공사를 시작하여 1949년부터 천일염을 생산하였다.
‘정관평’은 중국 당나라 태종의 연호 ‘정관’에서 따온 것으로 평화 안락한 지상 극락을 건설하겠다는 의미이다. 원불교를 창시한 박중빈은 1918년 8명의 신도와 함께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의 갯벌을 메워 3만여 평의 논을 간척하였다. 원불교는 1958년 1차 간척지 외부에 27,000평을 추가로 간척하였다. 정관평 간척지 인근에 원불교 영산성지가 조성되었다.
김연수, 김성수 형제는 1924년 삼수사(三水社, 1931년 삼양사(三養社)로 변경)를 설립하고 장성, 부안, 고창, 정읍에 농장을 경영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부안 줄포면 우포리와 고창 흥덕면 신덕리 사이의 간척지를 인수하여 24ha의 논을 조성하였다. 함평군 손불면에서는 1931년에 간척을 시작하여 1933년 마무리하였고 390ha의 농토를 조성하였다.
1930년 5월 일본인에게 매립이 허가되었다. 면적은 2,070ha로서 일제강점기 단일 간척지 가운데 최대 규모였으며 1936년 일본인 회사인 보성흥업주식회사가 사업권을 획득하여 진행하였다. 보성흥업은 농업경영, 발전 등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자본금 500만원의 대기업으로, 간척지의 농업용수 확보와 전기 생산을 위해 보성강 댐을 건설하였다. 이 간척지는 1943년 동양척식주식회사 계열사인 아스시마[飛島]농사주식회사로 인수되었다.
해남윤씨가는 전남 해남, 무안 등 서남해안 지역에 대대로 살아온 가문으로, 조선 중기 이후 지속적인 간척으로 소유한 토지를 늘려 나갔다. 전남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는 길이 380m의 윤고산둑이 남아있는데 윤선도가 지역민들을 동원하여 200ha의 토지를 간척한 것으로 전해진다.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의 백야지는 16~18세기에 걸쳐 간척하였으며 해남 윤씨가의 가장 넓은 간척지이다.